홀로 사는 어르신의 이야기 "잘 살고 있다는 표식"
《사회적돌봄》 2013. 10. 8. 17:54 |아름다운재단은 '태평양홀로사는노인지원기금'을 기반으로 2006년부터 홀로 사는 어르신의 생계비를 지원하고 있으며, 2013년에는 78명의 어르신을 돕고 있는 중입니다. 지원을 받고 계신 어르신 중 김인선(가명) 어르신을 만나 그 간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그녀의 시간을 존중하다
김인선(가명) 할머니
처음 만난 사람의 나이가 궁금한 이유는 그 삶을 가늠하고 싶어서다.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어리다, 젊다, 많다, 늙다 등의 형용사로 묶어 대상을 단정하고 평가하려는 게 아니다. 시간과 공간을 잇고 기워 일상을 꾸린 개인의 역사가 듣고 싶어서다. 여든 여섯의 김인선(가명) 씨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듣는 건 그 맥락의 일이다.
그녀는 1927년, 경상도에서 태어났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였다. 곳곳에서 흉흉한 일들이 벌어졌으나 그녀는 무탈했다. 그리고 열여덟 살에 독립을 맞이했다. 스물 셋에는 한국전쟁도 겪었다. 그 바람에 남편을 만났다.
“한국전쟁 때 우리 남편이 경상도로 피난 와서 친정에 있었어요. 사람이 착실하니까 우리 아버지가 결혼을 시켰죠. 결혼해서 바로 서울로 왔어요. 통의동인가 어디인가.”
남편은 통의동사무장으로 일했다. 월급이 나쁘지 않아서 살림 꾸리기가 수월했다. 차고 넘치도록 풍요롭진 않아도 부족할 건 없었다. 욕심도 없는 데다 서른인 1957년과 그 이듬해에 두 아들을 낳았으니 바랄 게 없었다, 가족의 건강 외엔. 서른다섯의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이 품었던 단 하나의 바람에 배신당했다.
“남편이 정이 많았어요. 점심시간이었대요. 그냥 쉴 것이지, 누구네 집 일 거든다고 하다 갑자기 그 집이 무너져서 죽었어요. 당시 한국전쟁 나고 폭격 때문에 여기저기 집들이 부실했거든요. 청천벽력이었죠… 별안간 돈을 벌어야 했어요. 상 치르고 얼마 안돼서 일 하러 나갔죠. 수색인가에 있는 밭 일요. 한데 얼마 하지도 못하고 저마저 혈압으로 쓰러 졌어요.”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쓰러지다
뙤약볕 아래서 파를 뽑다 쓰러져서는 꼬박 석 달 동안 사경을 헤맸다. 남편을 잃은 그 해, 1962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일제강점기와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과 휴전 그리고 4.19혁명과 5.16쿠데타의 격동을 지내면서도 일상을 지킬 수 있었다. 가난해도 소박한 꿈을 꾸며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았다. 그런데 남편의 죽음과 그녀의 운 좋게 한 발짝 비껴서있던 재해 같은 운명이 그녀의 인생을 뒤덮었다.
“눈을 떠보니 네 살, 다섯 살 아들 둘은 이미 다른 집에 입양을 보냈더라고요, 남편의 수양누나가. 아마도 내가 못 일어날 것 같았나보죠.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고 해도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까 걱정했겠죠. 그나마 작은 아들은 못 견디고 돌아왔는데 고등학교 때 집을 나가서는 한동안 소식이 없었어요. 최근 들어 몇 년에 한 번씩 손님처럼 들렀다 가곤 해요.”
남편과 아이들을 한꺼번에 잃고 그녀는 오랫동안 모래폭풍을 안고 살았다. 오로지 메마른 슬픔을 벗 삼은 반백년이었다. 처음엔 어떻게든 암흑뿐인 사막을 벗어나려 애썼으나 소용없었다. 특별한 기술도 없는데 몸까지 아프니 생계를 꾸릴 방법이 없었다. 지인이 식당 설거지를 맡겼으나 하루를 살기에도 빠듯했다. 아들들과 함께 살려면 한 푼이라도 더 벌고 모아야 하는데 쉽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가능한 일인 양 여겨졌다.
“처음 쓰러졌을 땐 한 쪽 발은 절룩거리며 지냈는데 그마저도 못 쓰게 된 지 20년이 지났어요. 약을 못 써서 그렇대요. 그때부턴 지금 이곳 은평구 반지하방에서만 지내죠. 이 앞에 어린이집이 있는데 가끔 창밖으로 애들 데리고 지나는 게 보이거든요. 가슴이 미어져요, 애들이 생각나서. 그러면 배고픈 줄 모르고 슬퍼만 하다 어지러워서 약을 먹죠, 당뇨가 있어서요.”
한동안은 체념한 슬픔이었다. 어디에서든 잘 살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 지 10년째다. 그런데 지난해 큰 아들의 부음을 들었다. 예기치 않은 사건에 낙담해서 세상을 떠났다는 말에 김인선 씨는 수십 년간 묻어둔 눈물을 쏟아냈다.
고통의 순간을 묵묵히 지켜주는 사람들
“몇 십 년 동안 혼자 방에 들어와 누워있으니 생각나는 것도 없고 무뎌져요.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아프죠. 어느 순간 불안해지고 그러면 불안해져요. 아무 바람도 안 생기죠. 얼른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예요. 남 신세 덜 지고. 그러다가도 이렇게 사람이 찾아들면 고맙고….”
당뇨가 심해서 오래 앉아있기도 힘든 그녀가 그래도 살아있어서 다행이라고 느끼는 순간은 사람들이 찾아올 때다. 집주인이 집수리 때문에 들렀을 때, 교인들이 옷과 먹을 것을 가져다줄 때, 요양보호사가 병원에 데려다주러 올 때, 행복창조노인복지센터 복지사가 들렀을 때 김인선 씨는 살아있는 자신과 마주한다.
“여러 사람들에게 신세만 지고 살아요. 그럴 의무도 없는데 나를 도와주니 고맙죠. 사람들을 보면 밖이 어떤지 알 수 있어요. 유일하고 절실하죠. 돈도 그렇죠. 옛날엔 정말 많이 아팠는데 아름다운재단에서 약값을 지원 받고나서 많이 나아졌어요.”
김인선 씨는 7년 전부터 아름다운재단의 ‘홀로 사는 어르신 생계비 지원사업’에 선정돼 생계비와 의료비 명목으로 매달 20만 원을 지원받으며, 이 돈으로는 약값을 해결하고 있다. 생활비는 요양연금 10만 원과 교회에서 받는 3만 원으로 충당한다. 빠듯하지만 이마저도 감사하다는 그녀는, 간혹 들르는 아들 때문에 기초수급자가 되지 못하지만 그 또한 아들이 잘 살고 있다는 표식이기도 하니 괜찮다고 말한다.
“도움을 주셔서 병원에 잘 다니고 있어요. 이렇게 사는 게 부끄럽고 고달프고 슬퍼서 이제 더는 살기 싫다고 생각할 때도 있는데, 도와주시는 분들 생각하며 다른 마음을 먹어요. 기도할 줄 모르는데도 기도하죠. 다 잘 되게 해달라고, 그들 가족이 건강하기를 바란다고. 내가 갚을 수 있는 건 그것뿐인 것 같아요.”
돌아보면 굽이굽이 고통이 들어찬 시간이었다. 지금도 그 고통은 지속된다. 그녀의 내외부로 흘러 다닌다. 이런 상황이라면 과연 타인의 관심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도 싶다. 매월 지원되는 약값이 최선인가 갸웃거려지기도 하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기 때문에? 삶이 죽음보다 선이라서? 아니다. 이것은 삶과 죽음의 우위를 떠난, 인간성의 최선이다.
집주인이 들러보고 교회 사람들이 옷가지를 챙겨주고 요양보호사가 살림을 돕고 아름다운재단이 병원비를 지원하는 그 순간, 그녀는 고통을 홀로 겪지 않아도 된다. 50년을 겪어도 무뎌지지 않는 모래폭풍 같은 슬픔과 혓바늘 같은 절망 앞에서 외롭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사는 순간에는 지속될 고통을 견디는 그녀를 외면하지 않고 지켜봐주는 일. 그것이 그녀가 지낸 여든 여섯 해를 존중하는 방법이다.
글 | 우승연
아름다운재단의 사회적 약자 지원영역인 '사회적돌봄'이 바라보는 복지는 "사회로 부터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을 권리"이며, 주거권, 건강권, 교육문화권, 생계권을 중심으로 취약계층의 사회적 안전망을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지향을 담은 '홀로 사는 어르신 생계비 지원사업'은 한국재가노인복지협회와 협력하여 어르신을 고통으로 몰아 넣는 빈곤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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